꽤 긴 여행이었다. 내 돈 내고 간 것도 아니고 놀러간 것도 아니니 불평할 수는 없지만, 숨 쉴 틈 없이 반복된 열흘 남짓한 일정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사실 도쿄는 내게 서울만큼이나 익숙한 도시다. 그러나 이번에는 언제나 머물던 동도쿄쪽이 아니라 서도쿄 쪽에 있었더니 느낌이 또 달랐다. 동도쿄는 예로부터 시타마치로 서민적이고 시끌벅적하며 상업적인 느낌의 지역이고 서도쿄는 야마노테 지역, 즉 예전부터 영주나 무사가 거주하던 고지대로 지금도 고급맨션과 그림 같은 양옥들이 들어서 있다. 이번 도쿄행의 메인 일정은 키치죠지에 있는 세이케이 대학의 워크숍이었던지라 야마노테 지역의 아름다운 집들을 짬짬이 구경할 수 있었다.
숙소는 사정이 있어 키치죠지에서 전철로 몇 정거장 떨어져 있는 쿠니타치가 되었는데, 쿠니타치는 일본 시민운동의 기반을 닦은 동네라고 한다. 쿠니타치 바로 옆 마을인 타치가와에는 전후 거대한 미군기지가 들어섰고, 그에 따라 타치가와에는 유흥가가 번성했다. 타치가와에서는 불어나는 성매매 여성들의 집단주거지를 바로 옆 마을인 쿠니타치에 만들고자 했고, 이 성매매 여성들의 집단주거지 반대운동이 바로 쿠니타치에서 시작된 시민운동의 원점이라고 한다. 이 반대운동이 성공한 뒤 쿠니타치에서는 각종 시민운동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고. 대자본에 의한 지역의 개발을 지속적으로 반대해온 시민운동 덕분에 쿠니타치는 허름하고 낡은 역과 낮은 높이의 건물들, 여자가 나오는 술집을 포함 유흥가가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가 되었고 예술가들, 지식인들, 각종 쁘띠 부르주아들이 모여 들어 집값이 비싸다. 이곳은 국가에 저항하며 최근까지도 일장기를 달기를 거부한 동네이자 자신들의 지역에서 성매매 여성, 유흥업소 종사자들, 이주노동자들을 끊임없이 배제하는 동네이다. 이 두 가지는 이들 안에서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우경화하는 일본 사회에는 저항하면서도 자신들 안에서 끊임없이 비국민을 만들어내고 마는 사람들. 도쿄의 숙소였던 쿠니타치는 그런 곳이었다.
도쿄에서 닷새를 머문 뒤 신간센을 타고 교토로 향했다. 교토는 초행이었는데 생각보다 아담했다. 도쿄와 마찬가지로 교토에서도 관광할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 기억에 남는 건 많지 않다. 기억에 남는 건 교토대와 리츠메이칸대의 식당들 뿐. 아 교다이의 구여운 아이들 보고 정말 침 많이 흘렸다(L양 왈 : 얘네들 지금 언니랑 띠동갑인 거 알지요? ...-.ㅜ). 교토에서는 소중한 만남들이 많이 있었다. 박선미 선생님, 론각샤의 무시가 무네히로 선생님, 도미야마 선생님, 사키야마 선생님...내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내가 이 사람들과 서로를 촉발할 힘을 가지고 있을까? 자리를 잘못 찾은 듯한 불안함과 망설임 속에서 교토의 닷새가 지나갔다. 말로만 듣던 기온의 밤거리와 그 거리를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듯 걸어가던 마이코들과 게이코들. 보는 것만으로 이유없이 눈물이 나 주체할 수 없던 비안개 속의 카츠라가와를 뒤로 한 채.
돌아오니 열흘 못본 고양이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마냥 껴안고 있느라 짐도 제대로 풀지 않았다. 타이완과 오키나와, 재일조선인 관련해서 사들인 책들과 몇 종류의 잡지들도 아직 쌓아놓은 채. 이번 유리카 특집은 만화비평은 어디로 가는가 인데 휘리릭 넘기니 요시나가 후미의 그림이 나오더라. 재미있으면 관련해 포스팅할 생각. 가라타니 고진과 우에노 치즈코와 양석일이 함께 실린 이상한 잡지 at도 사왔다. 고진 선생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범인인 나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 일단 읽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이 조합 너무 이상해. 아,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오타쿠 이야기로 밤을 새워주고 가라오케에서 아니메송 메들리를 불러제껴준 다카하시군과 이시카와군 땡큐! 사랑하는 나의 loki, 널 이 인간들에게 연결시켜주지 못하고 귀국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오타쿠는 오타쿠와 놀아야 하거늘...^^;
결국 이성을 잃고 화를 냈다. 화가 난 진짜 이유를 숨기기 위해 별 시덥잖은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처럼 굴었다. 졸지에 성질 급하고 까다로운 인간이 되어버렸지만, 진짜 이유를 숨길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한다. 설사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이라 해도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고맙다. 나다에 혼자 앉아 아사노 타다노부의 어리버리쇼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을 멍하니 보면서 왜 내 욕망은 블랙홀에 빠지고 말았는지를 비관했다.
송년회에서 몸짓을 선보이기로 했다. 반주도 의상도 갖춰졌으니 빠진 것은 오직 자발성 뿐이다. 아 몸짓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도대체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난다. 분위기에 맞게 밝고 쉬운 것으로 가려했지만 '바위처럼'만은 모두 그만두자고 하여 결국 '처음처럼'이 되었다. 그런데...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지지난주 이주노동자연대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점거농성을 할 때 지지방문을 갔는데, '철의 노동자'를 부르다가 가사가 기억이 안 나서 순간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나이를 느끼는 것은 서글프다. 그러나 더 서글픈 것은 이것이 나이 문제라기보다는 현장에서 그만큼 떨어져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절박하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도전 수퍼모델 3을 보고 있다. 야야를 응원하고 있지만 사실 우승자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케이시의 힘없고 의욕없는 느낌이 독특하고 좋았는데 그 이유로 일찌감치 탈락했다. 아만다, 노렐, 야야가 좋고 앤과 이바가 싫으며 니콜은 도무지 존재감이 없다. NHK 뉴스로 보는 황박 사건은 묘하다. 일본에서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난자에 관한 윤리문제만은 다시 이야기되길 바란다. 그나저나 요즘 주변에서는 (마신 술이) 한잔이면 어떻고 세잔이면 어떠냐 (빌린 책이) 한권이면 어떻고 세권이면 어떠냐 하는 훈훈한 농담이 유행 중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북적이는 혜화동로터리에서 이유없이 차를 돌려 남양주로 달렸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작년보다 나았다. 내년에는 더 나아지기를. 메리 크리스마스.